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은 ~~
전도유망했었다.
지방 국립사대 가서 교사되어 빨리 집안 도와야 한다고 했었다.
뛰어난 두뇌가 너무 아까워
고3 담임이시던 울 아버지가 우겨 국내제일의 공대에 진학 시켰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걸 아신
울 아버지가 적잖은 도움을 주신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울아버지도 그사람도 서로 애틋하게 잊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자연스레 왕래가 잦아지면서
우린 한식구처럼 스스럼 없이 지냈다.
대학졸업 후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원에 출근하려던 찰나 사고를 당했다.
하숙집 옮긴게 화근이었다.
그 당시 많이도 당했던 가스 중독 ~~
하숙집 장판을 젖히니 방가운데가 쩌억 갈라져 있었다는~~
쓰지 않던 방을 한번 확인도 안하고 ~~
하나 있는 쓸 자식 데려가심 어떡하냐고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 하던
그의 어머니가 아직 눈에 선하다.
4살이 많던 수재오빠
잘난것 없는 나였지만 존경하는 은사님의 딸이라는
그 하나만으로 날 끔찍이도 아껴주었다.
그리고
핑크빛 미래도 함께 설계하는 애틋한 사이로 발전했었다.
그 모든게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두고 두고 생각해도 너무나 아까운 사람,
제대로 있었다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아~~~
울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자책하셨다.
지방대 가게 놔둘걸 그랬으면 사고 당하지 않았을걸 하시며
후회하고 애닯아하셨다.
버스는 떠났고 후회는 남은자들의 몫이 되었다.
난 그후로 소소한 물건 하나도 그와 관계가 떠오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리고 가슴 절절한 나먼의 추억을 꼭꼭 챙기고
작은것 하나하나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선물로 받은 석사과정 졸업 논문
난 아직까지 보물처럼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라 이해는 못하지만
아무튼 그의 분신이라 남다른 애정이 깃들여져 있다.
비바람이 부는날,
계절이 바뀔 때 즈음 ,
마음이 공허 할 때는
배고픈 아기가 엄마 젖 찾듯이 항상 꺼내
그와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반추한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산다고
그를 보낸지 어언 36년이 흘렀다.
만약에 그와의 인연이 계속되었으면 어떠하였을까?
라는 가정을 항상 하면서 살아왔다.
한시도 잊은 적은 없다. 다만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랬을 뿐 ~~
큰 아픔이지만
가슴 한켠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나만의 역사~~
소풍 끝나 다시 만나면 원망보따리 화악 풀어 놓을 것 같다.
나두고 왜 먼저???
많이 보고 싶었고 많이 그리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