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에 청상 과부가 되어 59살 교통사고로 소풍 끝날 때까지 우리와 같이 살았다.
안동 가일 이란 곳에 출가해서 우린 그렇게 불렀다. 가일 아지매라고~
고모부는 그 당시 학생 운동하다 감옥에 가셨는데 형만기 후 집에 온 후 음식을 잘못 먹어 돌아가셨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보성 고보 였다고 기억 되는 ~~
아들 죽은 며느리 곱게 보일리 없었는지 억울한 누명쓰고 친정인 우리집으로 돌아와 우리 5남매를 거의 다 키우다시피 하면서 같이 살았다.
울 어머니와는 동갑내기로 둘도 없는 올캐 시누이 사이였다.
이후 아버지가 우리들 교육문제로 집을 고모한테 맡기고 대구로 나가셨을 때
나는 이고모와 초등학교 들기 전까지 같이 생활헸다.
고모 혼자 있으면 적적하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작은 배려였다.
부모 떨어져 있다고 고모는 극진히 나를 아꼈다.
하루도 찐계란 빠지는 날이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일종의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7살이 되어서도 외출시에는 항상 나를 업고 다니곤 했다. 난 엄마보다 가일고모가 더 친근하게 느끼고 더 사랑했던것 같다. 항상 울면서 엄마 보다는 가일아지매~~ 이러면서 울었다.
이런 나를 더욱 애정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던 우리 가일 아지매였다.
세월은 흘러 내 반듯한 직장 얻어 첫 월급을 탔을 때 난 부모님과 똑같은 선물을 드렸다. 빨간 내복 한벌 ~~
무덤덤한 엄마와는 달리 아지매는 그 내복을 펼쳐 보고 또 보고 하셨다. 그리고 감동어린 시선으로 날 쳐다보며 우리 숙이가! 고맙다 고맙다 떨리던 그목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신은 착한 사람을 먼저 불러가시는 걸까?
동생이 대학교 들어가자 아버지는 낙향하셨고 동생, 나, 고모 이렇게 남게 되었다.
소풍 떠나시던 그날은 내 봉급날이어서 맛있는 음식시켜서 먹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날따라 고모는 그렇게 흥을 낼 수가 없었다. 숱가락으로 판을 두드리면서 구성진 노래도 하셨다. 예측하였음일까?
그리고 그냥 잤으면 아무일 없었을텐데 국거리 산다고 누가 부르는 것처럼 나가신 아지매는 돌아오지 않았다.
휴지배달하는 트럭에 머리를 부딪혀서~~
그런데 운명은 피할 수 없나보다. 나보고 대문잠그라 그 소리 하기 싫어 대문앞에 있던 크디큰 쓰레기통을 끌어다 놓고 가셨다 .
그 시간만 아꼈어도 운명의트럭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장례식날 동생과 나는 목놓아 울고 또 울었다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두들 애통해 했다.
경우바른 우리 아지매 우리한테 혹여 짐이라도 될까봐 그토록 일찍 가신 걸까?
내가 그나이 가까워 지고 보니 더욱 더 생각 나는 사람이다. 참 고운 아지매였는데...
얼굴도 맘씨도 아~~ 또 보고 시프다